성거산 성지와 선교사들

 

박해시 소학골 교우촌, 서들골 두 교우촌과 관련을 맺은 신부님들

 

◈ 1845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한 이후 성거산 교우촌과 관련을 맺은 신부들은

다블뤼(A,Daveluy,安敦伊) 신부와 최양업 신부, 페롱(S.Feron), 권스타니슬라오신부,

그리고 프티니 콜라(M.A. Petitnicolas, 朴德老,미카엘)신부 등을 들 수 있다.


다블뤼 신부는 1849년 후반 제 3대 조선 교구장 페레올(J.J. Ferreol, 高 요한)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교구 신학교를 설립 한 뒤 상당 기간 이 신학교를 ‘진천 배티’(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교우촌에서 운영하였다.

당시의 조선 교구 신학교는 다블뤼 교장 신부가 이전 할 때마다 함께 이전 되었던 이동식 신학교였다.

〈다블뤼 신부가 부모에게 보낸 1850년 9월 말의 서한,

다블뤼 교장 신부는 1851년 말부터 1853년 여름까지 조선 교구 신학교의 전담 사제로 임명되었다〉

 

이어 1853년 여름부터는 최양업 신부가 배티의 교구 신학교를 맡아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인근의 교우촌을 순방하다가 이듬해 봄에는 3명의 신학생을 말레시아의 페낭(Penang, 彼南)신학교로 보냈다.

(페낭 유학생 3명: 이 바울리노, 김사도 요한, 임 빈첸시오)

이 때 진천 삼박골과 이웃한 성거산 소학골, 서들골 교우촌도 순방하였다.

 

◈ 1858년 페롱 신부는 봄 판공 때 성거산 교우촌을 방문 하였다. 제주 표류 중이었던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배티 교우촌을 찾아갔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베티에서 40리 떨어져 있는 교우촌 성거산 소학골과 서들골 교우촌에 머물러 계셨던 페롱 신부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


◈ 1958년 10월에 프티니 콜라 신부가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정하고, 충청도 북부와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일부지역을 순방하였다. 이 때 성거산 교우촌도 그의 사목 관할 구역 안에 들어 있었다.

그러다가 프티니 콜라 신부는 1859년-1860년의 경신박해로 고초를 당하고는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1861년 10월 배론 신학교 교사로 임명되었다. 제4대 조선 교구장 장 베르뇌(S.Berneux,張敬一)시메온 주교는

1861년 4월에 입국한 선교사 4명이 초보 조선어 학습을 마치자, 그 해 10월에는 전국을

8개 지역 본당으로 구분하면서 각각의 선교사들에게 사목 관할 구역을 정해 주었다.

이때 충청도 지역에는 모두 4개의 본당 사목 중심지가 주어졌다.

 

충청도 4개의 사목 중심지는
◈ 다블뤼 신부의 판서골(현 보령시 미산면 삼계리)

◈ 리델(F. Ridel, 李福明)신부의 진밭(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 랑드르(J.M. Landre, 洪 요한)신부의 황모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

◈ 그리고 공주의 둠벙이(현 공주시 신충면 조평리)였다.

 

충청도 북부 지역은 공주 둠벙이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있던 조안노(P.Joanno, 吳 베드로)신부가 담당하였다.

이후로는 성거산 교우촌의 신자들은 조안노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2년 6개월 후인 1863년 4월13일 조안노 신부가 병으로 선종하자, 장 베르뇌 주교는 경기도 손골

(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경상도 서부 지역을 순방해 오던 칼래(N.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로 하여금 조안노 신부의 사목관할 구역을 겸해서 맡도록 하였다.

칼래 신부의 사목관할 구역이 충청도 북부에서 경기도, 경상도 서부 지역까지 넓게 확대 되었다.


1864년 여름 관할 구역 조정으로 칼래 신부는 페롱 신부가 기존해 담당해 오던 험난한 지역, 즉 경상도 남부에서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비롯하여 충청도와 경기도 일부 등 아주 넓은 지역을 담당해야만 했다.

또 이를 전후해서 성거산 교우촌과 진천의 배티, 삼박골 교우촌은 칼래 신부의 사목 관할아래 놓이게 된다.

실제로 칼래 신부는 이 무렵에 자신의 거처를 경기도 손골에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으로 이전하였고,

이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소학골은 칼래 신부의 본당 사목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의 소학골 교우촌에 대해 칼래 신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저는 제 담당 지역 사목 방문을 마치고 나면 여름 한 철에는 서울에서 220리 떨어진 충청도 목천현 소학골

마을에서 쉬었습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마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 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매우 좋은 피신처입니다.

따라서 마치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쫒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여기저기 절경을 찾아 눈앞에 듬뿍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 할 수도 있습니다.》


성거산 자락에 위치한 소학골 교우촌은 이와 같이 그 자체로 선교사와 신자들의 피신처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칼래 신부는 이후 사목관할 구역이 다시 변경된 이후에도 소학골을 사목 중심지로 삼고

경기도에서 충청도, 경상도 전역에 산재해 있는 교우촌을 순방하였다. 이와 같이 1840년 대 후반부터

성거산 교우촌은 이웃한 배티 교우촌과 함께 다블뤼, 최양업, 페롱, 프티니 콜라 신부의 사목 방문을 받아왔다.

그러다가 지역 본당이 설립되는 1861년 10월 이후로는 조안노, 페롱, 칼래 신부등이 이들

교우촌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게 된다. 특히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은 1864년 여름 이래

칼래 신부의 사목 중심지 즉 경상도와 충청도, 경기도 일부 지역을 사목 관할로 하는

본당 중심지로 선정되어 병인박해 때까지 안전한 안식처요, 여름 휴식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병인박해 이후에도 성거산 뜨락의 주위 7개의 교우촌은 점점

교우촌 수가 줄어들면서 통 폐합되다가 1920년에 사라지게 된다.

이 교우촌이 사라지기까지 이 교우촌에서 성사및 신자들을 돌본 선교사 신부님들을 보면

베르모델 신부님, 두세신부, 드비즈신부, 퀴틀리에 신부, 공 베드로 신부님들을 들 수 있다.

 

 

성거산 교우촌 순방 사제 추정 현황(1851~1866)

 

1. 1851년 말∼1861년 10월

 

사제명

시 기

소임 및 사목 관할 구역

사목 중심지

최양업

1850년 7월∼1852년 여름

전국 다섯 개 도 순방

진천 동골

1853년 여름∼1856년 여름

교구 신학교 및 전국 순방

진천 배티

다블뤼

1851년 말∼1853년 여름

교구 신학교 전담

진천 배티

페롱

1858년 봄

경상도북부. 강원. 충청 일부

* 임시 순방

프티니콜라

1858년 10월∼1860년 초

충청· 경상· 강원· 경기 일부

진천 배티

 

 

2. 1861년 10월 ~ 1866년 10월

 

사제명

시 기

소임 및 사목 관할 구역

사목 중심지

조안노

1861년 10월 ~ 1863년 4월

충청도 북부

공주 둠벙이

페롱

1862년 9 ~ 10월경

경상도 남부

* 임시 순방

칼래

1863년 4월

경기· 충청일부, 경상도 서부 

목천 소학골

1864년 여름 ~ 1866년 10월

경상도와 충청· 경기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