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산 성지이야기

 

천안 성거산(聖居山) 교우촌과 순교자 묘지 약술안내(略述 案內)

 

경기도와 충청북도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도

보기 드문 해발 579미터로 차령산맥 줄기의 높은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천연(天然)성지이다.

특히 봄, 가을에는 들꽃과 단풍으로 여름과 겨울에는 울창한 숲과 환상적인

눈(雪) 경치로 장관을 이루어 찾아온 순례자들은 감탄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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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성거산 성지는 3가지로 약술(略述)하여 소개 할 수 있다.

 

성거산 성지는 박해시기에 마을에서 살 수 없었던 신자들의 이주 현상이 일어나면서

형성된 '교우촌'과 이 교우촌에서 사목 및 활동하셨던 '선교사들'

그리고 교우촌에 살던 신자들이 잡혀 순교하신 '순교자들'을 소개 할 수 있다.

 

 

 

성거산에 형성된 교우촌들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의 이주기(移住期)에 형성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과

1830년대에 형성된 서들골(일명 서덜골) 교우촌은 박해시 선교사들과 신자들의

피신처요 은신처였다.

특히 소학골은 한 때 칼래 신부님의 사목 중심지로 삼아 활동하기도 하였던 곳이기도 하며,

서들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님의 큰 아버님인 최영렬씨가 1827년 고향 청양 다락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여 살았고,

1839년의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님의 둘째 동생인 최선정 안드레아가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이곳에서 잠시 성장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병인박해 이후부터 계속 생겨난 교우촌들은

점점 통폐합 되었다가 1920년에 와서는 7개의 교우촌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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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시 교우촌에서 사목 활동을 하셨던 선교사들

 

1845년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박해시기인 1851년부터

1861년 10월까지 이 곳 교우촌에 순방하고 관련을 맺었던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를 보면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신부, 페롱신부, 권스타니슬라오 신부, 프티니 콜라 신부 등이

사목방문을 하였고, 1861-1866년 10월까지 이어서 조안노 신부, 페롱신부, 칼래 신부 등이

사목방문 및 활동을 하였다.

특히 칼래 신부님은 1864-1866년 10월까지 소학골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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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목천 순교자들

 

또한 병인박해의 목천 순교자를 보면 1866년 10월(음력) 소학골과 서들골,

주위의 교우촌이 발각 되기 시작하면서 계속 포졸들이 덮쳐 이곳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잡혀

모두 23명이나 순교하게 되었다.

소학골 교우촌 9명, 서들골 교우촌 4명, 복구정 교우촌 2명, 베장골 2명, 장자동 4명,

공심리 1명, 목천 1명 모두 23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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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서울 좌포도청(11명), 공주감영(6명), 청주(2명), 죽산(3명), 미상(未詳 1명)에서 순교하였다.

현재 병인년 10월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순교한 배문호(베드로)와

최천여(베드로), 최종여(나자로), 고요셉과 최씨 며느리 등 5명의 시신만이

성거산 성지 제1줄 무덤에 묻혀 있다.

이 이외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현재 이 곳 성지에 이전(移轉)한 여섯분들의 증언과

순교자들 후손들의 구전으로 전해 오는 이야기에는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이곳에 묻혀 계신다고 한다.

하느님과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증거한 장한 순교자님들은 그 동안 오랫동안

오고가는 사람 없이 들꽃들과 벌, 나비, 짐승들만이 함께 했던 성거산성지의 교우촌과

무명 순교자 묘소는 침묵의 역사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이제는 신앙인의 순례의 선교지가 되고 있다. 달이 바뀔 때마다 주위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야생화는 마치 우리 순교자들과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과 신앙 때문에 흘린 피를 상징하듯이

오는 순례자들을 반기고 있다.

 

 

성거산 자락의 교우촌들(1800년부터 1920년까지 무려 7개의 교우촌 형성)

 

① 소학골 교우촌(현 천안시 목천읍 납안리 )

성거산 자락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동쪽자락에 위치해 있고, 목천읍 석천리의 산방이와

먹방이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성거산 교우촌의 이름이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난 것은 1839년 기해박해 직후였다.
그러나 소학골은 1800년 초 신유박해 이후 신자들이 하나 둘 이주해와 정착하였다.

처음부터 정주형 교우촌이자 신자 공동체 형으로 정착하였다.

이 공동체는 전교 자유기까지 변함없이 신앙공동체로 유지되어 왔다.

 


② 서덕골(서들골) 교우촌: (현 천안시 목천읍 송전리의 서덕동)

성거산 남서쪽 자락에 위치한 서들골은 1830년 초부터 알려져 왔다.
기록에 나타난 것을 보면

최양업(토마) 신부의 백부 최영렬이

1827년 무렵 고향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래골)을 떠나

서울 낙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직후 최양업 신부 둘째 아우인 최선정 (안드레아)이

목천 서들골의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의 첫째 아우인 최의정(야고보)가 겨우 13살로

부친 최경환(프란치스코)과 모친 이성례(마리아)가 모두 순교하면서

어린 동생들의 양육을 담당할 수 없게 되자

모두 친척으로 보냈다고 한다.

이후 성거산 교우촌은 오랫동안 교회사에서 그 이름을 감추게 되는데

그 이유는 소학골이나 서들골 두 마을 모두 외딴 산간 지대에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있지만,

이보다 비밀 공동체가 철저하게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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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 이후 - 1920년까지 성거산 뜨락의 주위에 형성된 교우촌

 

◈ 먹방이 교우촌(1884년, 두세신부) 공소 신자수가 128명; 현 목천면 석천리)
◈ 매일골 교우촌(1895년, 퀴를리에 신부, 현 목천면 송출리)
◈ 사리목 교우촌(1901년, 드비즈)
◈ 석천리 교우촌(1913년, 공베드로 신부), 112명(현 목천면 석천리)
◈ 도촌 교우촌(1919년, 공베드로 신부), 110명(현 북면 납안리)
◈ 납안리 교우촌(1920년, 공베드로 신부) 51명